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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윤성여 보상금> 화성 이춘재 연쇄 살인사건 누명 피해자 (윤성여 재심, 보상, 나이, 담당형사)

by 김원준님 2020.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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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사건 누명 피해자 윤성여

화성 연쇄 살인사건 간단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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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개요를 간략하게 설명 드리면

1980년대 경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 사건 중 8차 살인 사건에 대해서 서술한다. 언론에선 일반적으로 줄여서 '화성 8차 사건'이라 칭한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윤성여씨가
지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복역 후에 출소하였으나 이춘재의 자백과 다시 수사한 결과에 의해
재심이 진행중이다.


해당 사건내용을 보면
1988년 9월 16일 태안읍 진안리의 가정집에서
일어났으며 피해자는 1974년생 박 양이다.

9월 15일 피해자는 가족들과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밤 11시 20분경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잤다. 다음 날인 9월 16일 오전 6시 50분경, 피해자의 어머니는 피해자의 방으로
들어온 뒤, 사망한 딸을 발견했다.

피해자의 목에는 강하게 압박당한 자국이 있었으며,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보였으나 옷은 그대로 입혀져 있었다. 또한 문고리 부분의 창호지가 찢겨 있었다. 경찰은 범인이 담을 넘어 집에 침입한 다음 창호지를 찢은 뒤 문고리를 따서 방에 들어왔으며, 피해자를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한 다음 다시 옷을 입히고 이불을 덮어두고는 도주한 것으로 보았다.
사망 추정 시각은 9월 16일 새벽 2시경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피해자가 깔고 자던 요에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모가 채취되었는데, 경찰은 이 체모를 일본에 분석을 맡겼고 그 결과 일반인보다 300배 이상 많은 티타늄 원소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경찰은 이 분석결과에 따라 수리공들을 조사했고, 당시 경운기 수리센터에서 일하던
22세 윤성여 의 체모라는 사실을 확인 후 체포했다. 하지만 이전의 범행과는 수법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경찰은 모방범죄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당시 윤성여를 검거한 공로로 수사팀 5명이 1계급
특진하였다.


윤성여는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았다.
유죄의 근거로는 경찰 조사에서 본인이 자백을 한 점, 체모 성분 분석에서 나온 중금속 함유량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점이 고려되었다.체모 혈액형
분석도 B형으로 윤성여와 동일했다.


윤성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모범수로
20년으로 감형되어 2009년에 출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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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범은 누구인가?

검거된 후 대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윤성여가 정말 진범인지에 대한 논란은 이전부터 있었다. 무고한 사람을 잡았다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닌 것이 당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은 마구잡이식 수사를 했고 고문을 통해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던 이근안이 투입했었다는 것 자체로도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화성사건 수사과정에서 용의자로 몰린 3명의 남성이 자살했고 1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할 정도였다. 그리고 2019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으로 드러났던


이춘재가 8차 사건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다시 폭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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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의 주장

 

좌 과거 이춘재 얼굴
우 현 이춘재 얼굴

2019년 10월 4일, 진범 이춘재가
8차 사건에 대해서도 자신이 했다고
주장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다름 아니라 이 사건은 이미 몇십 년 전에 범인이 잡혀 모방범죄로 결론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윤 씨는 검거 당시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며, 만일 윤 씨가 진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질 경우 누명을 쓴 것은 물론, 경찰 측이 엄청난 배상금을 물려줘야 하고, 이춘재에 대한 성토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만약 이 범죄가 이춘재의 행위인 경우는
1차, 2차는 물론 후술 하는
수원 오목천 여고생 피살 사건의 범인이
이춘재 일 확률도 높아진다.


명백한 증거가 나온 이상 경찰을 놀려먹기라도 해 보겠다는 심보일 수도 있지만, 이 진술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엉뚱한 시민을 처벌하고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큰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윤 씨는 지난 2003년 옥중에서도 자신은 무죄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했다.

이춘재 살인사건 누명 피해자 윤성여


윤성여 씨는 재판 과정에서도 고문 당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으며 1심에서 기각당해 항소하였지만 2심과 3심에서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걸로 드러났다. "고문당해 허위 자백했다" 화성사건 8차 범인, 과거 항소했다가 기각당해
정말로 경찰이 엉뚱한 사람을 잡은 것인지, 아니면 경찰을 골탕먹이기 위한 이춘재의 장난질인지에 대한 법적인
최종 판단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이춘재의 신혼집은 피해자의 한두 집 건너 이웃집이었으며, 이 때문에 용의선상에도 올랐으나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는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과수 조사관의 말에 따르면 혈액형이 B형이 아닌 사람은 음모를 제출했어도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거된 음모가 너무 많고 국과수 업무가 과중해서 혈액형이 B형인 사람의 음모만 검사했다는 것이다. 이후 정말로 당시에 이춘재의 체모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8차 사건 이후 한동한 범행이 없다가 윤 씨가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구속된 이후에 이춘재가 9차 범행을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 있다. 8차 사건을 이춘재가 했다고 가정하면, 경찰을 피해 몸조심을 하다 엉뚱한 사람이 누명을 쓴 것을 보고 안심하고 추가 범행을 시작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10월 10일, 경찰의 정례 브리핑에 의하면 이춘재의 8차 사건 진술 중에 유의미한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피해자의 집 위치, 침대, 책상 위치 등 범행 현장을 정확하게 그림으로 그렸으며 피해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침입 방법 등에 대해서도 범인만이 알 수 있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이춘재 31년 전 8차 피해자 침대까지 정확히 그렸다" 8차 사건 당시 증거물은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현장에서 수거된 토끼풀과 인근에서 8차와 비슷한 수법으로 일어난 미제 강도사건의 증거물인 창호지와 벽지를 국과수에 감정 의뢰하는 한편, 당시 담당 형사들을 조사할 예정이다.
아쉽게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인지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들 중 한 명은 교통사고로 인하여 고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전부 퇴직했다.

 


한편, 굳이 8차 사건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가 이후에 말을 바꾼 거냐며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는 경찰의 잘못이다. 이춘재가 말을 바꾼 게 아니라, 이춘재는 처음부터 8차 사건 역시 자신이 했다고 말했지만 경찰이 언론에 필사적으로 은폐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로로 언론이 유출된 정황이 포착되고 더 이상 숨기려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 같자 10월 4일 경찰이 8차도 이춘재가 한 것으로 자백했다고 시인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외부에 유출되어 더이상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춘재는 말을 바꾸지 않았으며 경찰이 정보를 은폐해서 오해를 유발했다. 경찰이 처음에 8차 사건을 제외하고 발표한 정확한 이유는 공식적으로 불명이긴 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충분한 조사와 사실여부 확인은 당연히 필요하다. 이전에도 유영철이 정남규가 저질렀던 이문동 살인 사건을 자기가 한 것이라 주장했던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의 필사적인 은폐에도 불구하고 시인한 이상,
이제 검찰과 법원의 시인만 남은 셈이다.

재조사 결과가 나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제2의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의 사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약촌 오거리 사건에서 재심 변론을 받아 무죄를 이끌어낸 박준영 변호사는 윤 씨의 변호를 맡을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윤 씨 역시 법적 대응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30년 전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아무도 도와준 사람이 없었다"며 "신분이 노출되면 직장에서도 잘릴 수 있어서 당분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재심 준비가 끝날 때까진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결국 재심 청구를 하기로 하였으며 박준영 및 김칠준 변호사가 맡아
진행하게 된다.

이춘재는 윤씨가 재심에 자신을 증인으로 요청을 했다는 얘기를 담당경찰에게 듣고 증인출석 용의가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8차 살인을 다룬 MBC 실화극장 죄와 벌(2003)에서 제작진과 범인으로 잡혀있던
윤 씨의 인터뷰 중

윤성여 : 나는 죽이지 않았어요.
제작진 : 강간은요?
윤성여 : 강간도 안 했어요.
제작진 : 그런데 왜 자백하셨어요?
윤성여 : 그때 자백 안 했으면 내가 이 세상에 없었을 거예요.
제작진 : 억울하세요?
윤성여 : 억울하죠. 억울한 건 말로 다 못 하죠.

당시 윤성여와 10년 이상을 지낸 교도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윤성여는 교도소에 들어온 후부터 계속해서 무죄를 주장했으며, 잠도 재우지 않고 때리는 등 엄청난 고문을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이야기해 수형자들과 교도관들 사이에서는
'억울하게 들어온 애'라는 멸칭으로 조롱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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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의한 거짓 자백


윤성여는 강압에 의해서 거짓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화성 연쇄 살인 누명 쓴 사람들… 강압수사에 극단적 선택까지 참고로 윤성여는 고아로 학력은 초등학교 3학년 중퇴이고, 소아마비 장애인이며, 가난하고, 가족은 누나가 전부였다. 전통적으로 누명 쓰기 딱 좋은 사회적 약자이다.

= 진짜 드라마, 영화 이야기 처럼
윤성여는 너무 억울한 사람이다.

이에 대해 당시 8차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 측은
“증거가 뚜렷했기에 고문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기사의 기자와의 통화에서 “특정인이 범인이라는 심증은 있는데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을 때 하는 게 고문이지 증거가 있는 경우는 다르다”라고 말했는데 이 발언, 역으로 생각하면 증거가 없을 땐 고문을 한다는 소리가 된다. 물론 박종철, 이한열 고문치사 사건과 같이
1980년대 대한민국 경찰들이 용의자를 고문했었다는 건 수없이 미디어에 나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긴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인터뷰한 경찰의 발언이 부주의했던 것인지 기자가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을 사용한 건지는 지켜볼 일이다. 화성 8차 사건 수사경찰
"증거 뚜렷 고문할 필요 없었다."

한편 당시 경찰은 윤성여가 조사를 받자마자
하루 만에 자백을 했다고 주장한다.

2심 판결문에도 '피고인이 경찰에 연행되어 거짓말탐지기 실험과 휴식에 소요된 시간을 제외하고 실제로 조사받은 지 4시간 40분 만인 다음날 05:40부터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기 시작하였다.'며 경찰 조사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하지만 윤성여가 경찰에 검거된 날을 7월 25일로 보면 실제 조사 기간은 더 길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27일 오후에 윤 씨가 자백을 했다고 나와있어 법정에 제출된
수사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윤성여에 의하면 거짓 자백을 강요당하며 사흘간 잠도 안 재웠다고 한다. 윤성여가 지목했던 최 형사, 장 형사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또 다른 피해자의 주장도 나왔다. 또 등장한
‘장 형사’·‘최 형사’
“화성 8차 사건 허위자백 강요”

경찰마저도 이춘재의 범행이라 인정해서 '논란'의 여지는 사실상 없어졌다. 검찰은 직접 수사에 나서 당시 경찰과 국과수의 조작 정황을 포착하여 재심 법원에 무죄 취지의 증거를 제출하였으며, 법원 역시 재심 과정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공판이 시작되기 앞서 변호인이 동의한다면 이 자리에서 무죄를 선고할 수도 있다며 윤성여에게 사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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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심


형이 확정된 재판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재심이 불가능하지만 재판 결과를 뒤집을만한 확실시되는 증거가 발견될 경우 재심이 진행될 수 있다는 근거에 따라 8차 사건으로
20년 징역을 산 윤씨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나온 이춘재의 증언과 증거들을 봤을 때 윤씨가 누명을 쓴것이 거의 확실시되어 재판을 담당한 재판장은
"억울하게 잘못된 재판을 받아 장기간 구금이 됐다"며
"판사로서 굉장히 죄송한 마음을 느낀다"라며 무죄 가능성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윤성여 입장
"판사님이 사과하시는 것에 대해서 공감은 해요. 공감은 하는데 그 당시 판사님들, 그분들은 저는 얼굴도 못 봤어요"라며 원망스러운 마음을 밝히기도 했다.

 



유일하게 날 믿어준 교도관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가 종합편성채널 예능프로그램에 출연, 교도소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믿어줬던 교도관을 만나 그 동안의 소회를 털어놓았다.
윤성여씨는 18일 방송된 채널A ‘아이콘택트’에 출연해 박종덕 교도관과 눈맞춤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박모(당시 13·중학생)양이 성폭행 피해를
본 뒤 살해당한 사건이다.

박 변호사는 윤성여씨의 말을 빌려 “실제 억울하게 만든 사람은 직접적으로 이춘재가 아니니 (윤성여씨는) 검사와 판사가 더 밉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윤성여씨는 교도소 내에서도 흉악범으로 낙인찍혀 집단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해 수형 생활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고초를 겪던 윤성여씨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이날 함께 출연한 교정공무원 계장 박종덕씨였다.


윤성여씨는 박종덕 교도관에 대해
“유일하게 나를 믿어준 사람. 그가 없었으면
나는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종덕 교도관은 윤성여씨에게 “끝까지 살아야 한다. 살 방법은 인내심뿐이다”라고 응원하며 윤성여씨가 교도소 내에서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윤성여씨는 무기징역에서 감형돼 20년 만에
가석방 출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20년 만에 나온 감옥 밖 세상도 그를 잔혹한 흉악범으로 대할 뿐이었다. 윤성여씨는 출소 이후에도 사회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해 또 한번 좌절했다고 한다.
힘겹게 살아가던 윤성여씨를 위해 박종덕 교도관은 취업을 도와주기 위해 나섰다.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수용 생활을 하던 윤성여씨를 지켜본 박종덕씨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박종덕 교도관은 윤성여씨에 대해 “가장 신뢰를 느꼈던 수용자”라고 말하며 누구보다 힘들었을 윤성여씨의 상황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프로그램에서 두 사람 사이의 칸막이가 올라가고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 본 두 사람은 곧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박종덕 교도관은 고마움을 전하는 윤성여씨에게 오히려 그를 존경한다며 고통을 홀로 감내해 온 윤성여씨에
경의를 표했다.
아직 재심 재판이 진행 중인 윤성여씨는
“완전히 누명을 벗지 못했다”면서 “지나간 세월도 돌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이춘재에게 왜 그랬는지 꼭 묻고 싶다”고도 말했다.

출소 이후 힘들었던 생활과 관련해 윤성여씨는
“오죽했으면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고 싶더라”면서 당시 힘겨워하던 자신을 꾸짖고 붙잡아준 박종덕 교도관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윤성여씨는 출소 이후 자신을 문전박대하는 친척들의 모습에 서러웠다며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윤성여씨는 박종덕 교도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속마음을 숨겼다며 손편지를 꺼내어 진심을 전했다. 윤성여씨와 박종덕 교도관은 서로를 향해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박종덕 교도관은 윤성여씨에게 “외롭게 살지 말고 근처로 이사 와 가족처럼 지내자”고 제안했지만 윤성여씨는 자립을 위한 적응이 더 필요할 것 같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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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발표


2020년 7월 2일, 경찰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을 종결하면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본 발표에서 경찰은 이춘재가 저지른 23건의 범행을 확인했으며 아울러 8차 사건도 이춘재의 단독 범행으로 최종 결론지었고 이에 따라 잘못된 수사로 인해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 씨에게 사죄의사를 밝혔다.
경찰의 발표 직후 윤 씨는 취재진과 만나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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