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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김대중 납치사건> KT납치사건 (+ 꼬꼬무)

by 김원준님 202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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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 납치사건(KT 납치극)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김대중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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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은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야당지도자 김대중이 납치되어 한·일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된 사건 입니다.

암호명:KT납치극

1. 왜 김대중이 KT인지?

2. 김대중 납치사건 이유는?

아래 안내드립니다.


11월 1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한 일 미 3국이 출동한 희대의 납치 사건
'암호명 KT 그리고 흑색공작원'을 다뤘다.


사건의 시작

1973년 일본 도쿄의 한 호텔. 점심시간이 막 지날 무렵 22층 복도에서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다.
"지금이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 무리의 괴한들이 복도로 뛰쳐나와 방금 전 스위트룸에서 나온 한 남자를 덮쳤다.

암호명 KT로 통하던 남자였다.
납치범들은 KT를 스위트룸 바로 옆방으로 끌고 들어갔지만 얼마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이 도착했을 때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폭이 1m쯤 되는 대형 배낭 2개와 길이 13m의 나일론 로프, 수면 마취제가 담긴 약병 등이 남아있을 뿐, KT와 납치범들의 행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KT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도쿄에서 500km 떨어진 오사카 앞바다 였다. 칠흑 같은 밤,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 떠 있는 화물선으로 작은 보트 한 척이 접근했다.

그리고 은밀하게 보트에 싣고 온 화물 하나를 화물선으로 옮겨 실었다. 범인들은 대체 누구이고, KT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인지 테이프로 친친 감아둔 묵직한 화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호텔에서 납치된 그 남자 'KT'였다.


KT 납치 공작을 총지휘한 인물은 윤 대령 이었다. 그는 한국의 007로 통하던, 중앙정보부 소속의 흑색공작원으로 밝혀졌다. 일본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한국인 납치사건에 영화에나 나올법한 블랙 요원이 개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노린 건 과연 무엇이었을지 알아본다.


KT와 함께 있던 남자가 그 상황을 목격하자 “떠들면 한국의 수치가 됩니다. 조금만 참으시죠. 잠깐이면 됩니다”는 말이 돌아왔고, KT와 만난 두 남자는 감금됐다. 뒤늦게 KT를 찾아온 경호원이 KT가 납치된 옆방으로 들어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KT의 담배 파이프와
외투만이 남아 있었다.


경호원이 신고해 일본 경찰이 현장 조사부터 시작했다.
방은 어지러웠고 길이 1m 커다란 가방 2개가 안이 텅 비어 있었다. 13m 나일론 로프가 말려 있었고, 여기저기 피 묻은 휴지, 강력한 수면제인 페노바르비탈 담긴 병도 있었다. 또 제조사가 다른 총알이 담긴 탄창이 있었다. 탄창을 재활용 하는 건 야쿠자. 하지만 현장에 남겨진 또 하나의 단서는
북한 담배 백두산이었다.


공작단의 보스는 첩보세계의 거물이자
한국의 제임스본드라 불리던 육군첩보부대 북파공작원 출신 현역 육군 대령 윤대령. 그는 684부대라 불리는 실미도 부대 창설하고 지휘한 사람이었다. 윤대령은 KT를 납치해 차에 태워 오사카로 갔고 KT는 곧 화물선 용금호에 올랐다.
용금호의 선주는 중앙정보부였다.


KT는 온몸을 테이프로 칭칭 감은 채로 배에 올랐다가 테이프가 뜯어져 다시 붙이느라 얼굴이 드러났고,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경악했다. 납치사건 2년 전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납치사건 25년 후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암호명 KT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국회의원도 아니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감시하며 KT라는 암호명을 썼다.


= 김대중은 왜 KT라는 암호명 이였을까?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김대중의 이니셜은 'DJ'로 알고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대중의 영어이름: Kim Tae chung
앞 두글자 KT를 붙였다.


이야기를 계속 하지면
사건에 윤대령은 용금호에 탑승하지 않았다. 그는 신분이 확실한 고위직 가족들로 이뤄진 KT공작단이 KT 납치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자 홀로 잘못을 뒤집어쓸까봐 갈등했던 것.
여기에 비행기 소리까지 들려오며 KT는 살았다.

 

일명 KT보고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이 비행기를 보내서
자신이 살게 됐다고 확신했다.

그럼 그 당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3선에 도전하는
현직 대통령 박정희


김대중은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출마,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현직 대통령에게
94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이 대선 전후 기간 동안 김대중에게는
크고 작은 사고가 잇달아 일어났다.

1971년 1월엔 동교동 자택 마당에 담배갑 은박지로 싼 장난감 권총용 화약에 배터리가 연결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
이 사건은 처음엔 김대중의 조카인 김홍준(당시 15세)이 장난으로 한 것으로 자백하면서 해프닝으로 일단락 되는듯 싶었다. 그러나 김홍준이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로 인해 허위자백한 것으로 이내 진술을 번복하자 경찰 수사는 미궁에 빠졌으며 결국 김홍준은 검찰의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여 법원으로부터 석방 판결을 받는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총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해 5월엔 지원유세에 나선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으며 서거하기 전까지도 이때의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음모로 지목했다. 일련의 사건 사고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의 치료차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한다.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며칠 뒤인 17일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으로 망명을 택한다. 유신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 규탄하였고 19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초대의장으로 취임해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1972년에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전 측근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졌고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답방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남북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10월 유신이 있기 전에도 정부에서
북한에 먼저 통보를 해주게 된다.


워싱턴에서 미주 한민통을 조직한 김대중은 일본 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일본에 입국,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2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1973년 8월 8일,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의 초청을 받아 가진 회담을 끝내고 나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오사카로 옮겨져 납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대중은 말하였다.


사건이후


귀가하게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머니에는 애국청년구국대가 쓴 쪽지가 들어있었고, 그들을 납치범으로 특정한 수사가 펼쳐지며 나라에서 김대중의 경호를 맡겠다고 나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은 김대중 전대통령
납치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발뺌했다.

이후 2004년이 돼서야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가 출범됐지만 KT공작단에 대한 종이 쪼가리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대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이 납치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꼬꼬무가 이번에 다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납치사건 기자회견하는 김대중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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